2023. 5. 7. 이야기를 잇는 상점 열일곱 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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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강조하지만 이 꼭지, ‘그여자가 사제끼는 법’은 나의 과도한 사제낌에 대한 의미부여, 정당화,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또 이렇게 밑밥을 까는 이유는 최근에 거하게 하나를 사제꼈기 때문이고, 오늘의 이야기는 그 사제낌에 대한 변론요지서같은 것이랄까…
브랜딩이란 무엇인가. 사제낌에 거창한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질문부터 시작해야한다. 2017년 인권단체를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되어 내가 하고싶었던 것이 바로 브랜딩이었다. 나의 정체성을 가득 담아서, 누가 뭐래도 내 취향인 무드를 듬뿍 묻혀서, 각종 문구류를 비롯한 잡화, 소품, 빈티지한 오브제들을 나의 식대로 브랜딩하여 판매하는 것. 물건을 판매하고 누군가는 구매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나와 비슷한 취향인 사람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것. 그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모임을 꾸준히 제안하는 것, 아마도 이런 걸 하고싶었던 것 같다. 물론 이제와 정리해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6년이 흐른 지금, 나의 브랜딩은 여전히 모호하고 뾰족한 자기만의 특성을 가지지 못한채 헤매는 중이다.
프리랜서가 된 초기에는 무작정 인터넷 쇼핑몰을 열고 옷, 신발, 가방 등을 판매했다. 물건의 단가와 도매매장 호수를 적은 수첩을 손에 쥐고 도매에서만 통용되는 단어들을 어설프게 써가면서 물건을 사입하러 다녔다. ‘미송(지금 물건이 없고, 선불로 돈을 내고 가면 택배로 보내준다는 뜻)을 잡는다’거나 ‘장끼(영수증)‘ 같은 것들. 지금의 내가 무채색 계열의 옷을 선호하게 된 것은 그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컬러의 옷을 원없이 입어보았기 때문이 아닐지 추측해본다. 머리색마저 분홍색이었으니 말 다했다. 막연히 내 브랜드를 만들고싶어, 라는 생각만 가지고 무작정 시작했고, 책 한권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는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통해서 그것을 실현할 것인지 방법을 몰랐다. 당연히 안팔리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그렇게 어설프게 했는데도 종종 판매가 되었는데, 그게 더 신기했다. 정성스런 리뷰를 남겨주는 분도 있었다.) 도매시장을 다니면서 알게된 유의미한 ‘내 취향’은 옷보다는 가방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 그러다 동대문에서 눈을 돌려 남대문 악세사리 매장을 기웃거리며 너무 볼드하거나 키치해서 착용하기 부담스러운 아이템들만 사모았던 기억이 난다. 역시 거의 팔리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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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하고 튀는 컬러를 선호했다. 패턴도 화려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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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영부영 헤매고 있는데, 인권단체 활동가 시절 알고 지내던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가 일하고 있는 단체 소식지를 개편하려고 하는데, 디자인을 해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당시 나는 아주 조금 일러스트레이터와 인디자인을 다룰 줄 알았는데, 이 제안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인디자인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고 비영리 단체들의 디자인 외주 작업을 하게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방향전환의 이유에는 ’일단‘ 돈을 벌어야한다는 현실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프리랜서라 시간은 많으니 디자인을 하면서 쇼핑몰을 비롯한 브랜딩을 해나갈 수 있겠지라고 대충 생각했다. 디자인이랑 브랜딩은 뭐, 밀접한 분야잖아? 하면서. 흠..흠.
성북동 한켠에 작업실을 마련하고서 편집 디자인 일을 하면서 책 읽기부터 뜨개, 라탄, 비건음식 만들기, 와인 마시는 법, 손금 봐주기, 하와이 전통춤 훌라 배우기까지 분야를 넘나들며 모임을 열었다. 따로 광고도 하지 않았고, 인플루언서도 아니었기 때문에 반응은 정말 느리게 왔지만 종국에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고, 나는 응했다. 하지만 사제낌의 운명을 타고났던 나는(TCI 성격검사를 한적 있는데 무절제 100이 나왔었다... 위험회피는 거의 0에 수렴했고... 왜 모험가가 되지 않았니.) 들쑥날쑥한 프리랜서 수입에 적응하지 못했고, 3년쯤 지났을 때는 무절제로 살아온 댓가가 빚으로 쌓여있었다. 월 평균 수입을 따져보면 분명 내 또래 여느 월급쟁이만큼은 버는데, 더 웃돌게 벌 때도 있는데, 늘 돈이 없었다. 작업실에서 모임하면서 생기는 수입은 월세를 감당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했고, 이제 디자인 일을 줄이고 작업실과 브랜딩에 집중해야지 하는 마음은 다음 달 카드값 앞에서 손쉽게 무너졌다. 그렇게 부업이 주업이 되어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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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 벽보를 작업실 문 앞에 붙여두었었다. 유려하고 깔끔한 폰트들이 많지만 여전히 손글씨를 이상점 브랜딩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 이것은 확실히 내 취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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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의연한 척했지만 매일매일, 순간순간 엄청난 불안에 시달렸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외주 디자인 일이 꾸준히 들어오리란 보장이 없는데, 지금도 한동안 작업 의뢰가 없는데, 계속 이런 불안을 감당하며 살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건 의뢰를 받아서 그 쪽이 원하는 디자인을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하고싶은 디자인을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이럴 때 훗날 자기계발서를 쓸 대단한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 부지런히 몸을 일으켰겠지만 나는 그냥 누워있었다. 누워서 휴대폰만 들여다보면서 승승장구하는 ‘내가 하고싶은’ 브랜드들을 부러워했다.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기 직전에 하나, 또 끊어질랑말랑하면 하나씩 작업 의뢰가 들어와 인공호흡을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마침 딱 5월 이맘 때! 현수막 실사출력을 전문으로 하고, 각종 인쇄물 디자인도 하는 사회적기업 노란들판의 스카웃(!) 제의에 못이기는 척 넘어가 반프리랜서, 반직장인이 되었다.
왜 반반이냐면 노란들판에는 1시부터 출근하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외주 디자인일을 주로 하고, 따로 하는 작업이 없다면 망원동에 새로 연 ‘이야기를 잇는 상점’에 간다. 2가지도 버거워서 일을 줄이려고 했던 주제에 이제는 직장인이라니. 이게 다 무분별하고 무차별한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사제낌 때문이다. (지난 호에는 전세자금대출이 혼인신고로 이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의 대부분이 사제낌 때문이라 떠들었던 것 같은데 이번 호에서는 프리랜서를 포기하게 된 이유가 되었네..) 외부의 변화에 흔들림이 없으려면 경제적으로 독립된 상태여야하는데, 내 모든 수입은 국민카드가 가져가고 있었으니 나는 조그마한 바람에도 쉽게 쓰러지고 좌절했다. 물론 그 많은 잡다한 악세사리며 노트, 스티커, 옷, 가방 같은 것을 쥐고서...
다행인 것은 사제낌과 무너짐의 굴레 속에서도 꿋꿋이 작업실을 이어오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책 모임에서 만난 친구가 뜨개 모임 선생님이 되었고, 이상점 뉴스레터에 글을 연재한다.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더 많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이야기가 글이 되어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때로는 물성을 가진 오브제가 되어서 취향이 같은 사람들 가방 속에, 방 안에, 의미있는 어떤 것으로 자리잡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는 정말로 브랜드라는 것을 뾰족한 눈에 보이는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이야기를 잇는 상점이 망원동 한 켠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안을 더 끈끈하게 채울 무언가를) 요즘 내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은 ‘시간이 없다’, 혹은 ‘에너지가 없다’,인 것은 뭐랄까....지독한 돌림노래, 뫼뷔우스의 띠...그런 나의 징징거림을 한방에 뚝 그치게 하는 것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아이패드를 수납할 수 있고 주머니가 달려있는 샤넬 클러치. 결국 사제낌이 답인가. 급격한 결론이라 비난해도 어쩔 수가 없다. 사제끼고, 사제낀 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사는 삶... 더 많이 사제끼기 위해서 브랜딩을 더 제대로 하고 그래서 돈을 많이(??)벌고...크흠.
그여자가 사제끼는 법 1편의 주요한 아이템이었던 ‘루이비통 크로와상 백‘을 더 예쁘게 소화할 다른 사람에게 보내주려한다. 분명 내 취향, 누가 뭐래도 내 것이었는데 막상 가지게 되니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이 백을 들고 있는 한 누구보다 멋져보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 자체가 애초에 이 백을 사기 위한 합리화 중 하나였다는 걸 130만원이라는 큰 돈을 지불하고서야 깨달았다. 돌다리를 두들겨보고 건너기는 커녕 돌모양으로 허술하게 해놓은 다리도 무턱대고 건너다가 물에 빠지는 스타일인 나는, 이게 아니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나서야 아, 아니었구나 하고 머쓱해한다. 문득 오싹해지는 이유가 있다면 이런 머쓱함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섬광같은 깨달음... 또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크로와상백을 보내주면 이 클러치를 사느라 구멍난 통장을 거의 메꿀 수 있을 거라는 핑계를 대며 사제끼긴 했는데, 이것은 과연 내 취향일까. 얼마나 오래 내 취향으로 머물러주려나. (루이비통 크로와상백도 할머니 될 때까지 들거라고 내가 모으는 빈티지 백들은 다 그런 생각으로 사는 거라고 분명..그렇게... 목청껏... 말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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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요미 키링 하나 달면 더 예쁘겠다. 가방에 키링을 달고싶어 하는 것! 이것도 요즘 유행이 아니어도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내 취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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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딩의 시작은 자신을 잘 아는 것부터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 지난한 브랜딩의 과정은 나를 잘 알지 못함으로 생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헤맸는데, 정작 ‘내 취향’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내가 지금 열광하는 저 물건은 유행하기 때문일까, 내 취향이기 때문일까. 왜 그게 나의 취향이라고 느끼는지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 이유가 바로 내 브랜드를 뾰족하게 만드는 한 끗이 될테니까. 트랜드를 놓치고 싶지 않아 허덕이면서도 그 한 끗, 나만의 특징을 갖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른다. 일단 이 샤넬 클러치에 아이패드를 넣어가지고 카페에 가면 지금 구상중인 이야기를 잇는 상점 첫번째 굿즈인 필사 메모지 디자인이 알잘깔딱센(이 단어 꼭 한번 써보고 싶었어! 이미 유행지났나...)하게 나올 것 같다. 다음 호에는 부디 이 메모지를 소개할 수 있기를..... 그래야 사제낌에 보다 나은 변명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조금은 떳떳해질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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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와상이랑 이 클러치, 2개 다 가질만큼 양심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 팔로우하고 있는 빈티지 백 계정에서 보자마자 또!!!! 그놈의 “내거다!!!”를 외쳤지만 가격을 보고 흠칫하는 사이 누군가 잽싸게 사버려서 오히려 잘됐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빈티지 제품은 1개밖에 없으니까, 팔려버렸으니 못사겠네, 하면서. 그런데 몇일 뒤 구매가능한 상품으로 다시 진열되어있는게 아닌가! 사연인즉 택배로 발송되기 직전에 구매를 취소했다고... 이런 말 정말 안하려고 했는데... 나한테 오려고 그렇게 된게 아닌가....이것은 운명같은게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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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잇는 상점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 이야기들이 담긴 물건을 가끔씩 판매하는 곳입니다.
지금 '이상점'에는 '서로서로', '뜨ㅓ', '사부작 사부작', '개, 장소, 환대', '그 여자가 사제끼는 법' 5개의 이야기가 입점해있고, 매주 각 상점의 이야기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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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ways.spring111@gmail.com 서울특별시 마포구 포은로 134-1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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