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2. 이야기를 잇는 상점 열 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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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들어줘
얇은 실은 손가락이 아프지 않다. 물론 같은 동작을 몇시간동안 반복하면 손가락 관절이 아프고 얇아서 느리지만 조금만 성실하면 아주 큰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 지구력이 부족한 주인장은 얇은 실로 큰 작업을 하기 전에 약간의 다짐을 한다. 새것을 만들기 위해 다시 소비하는 일에 회의감이 들고 있어, 이번에는 최대한 집에 있는 실을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콘 단위로 구매해서 아직도 남아있는 얇은 검정실(18합 면사)로 따뜻한 날 들고 다닐 수 있는 네트 백팩을 만들기로 했다.
네트 가방을 생각해 냈을 때는 영하 20도를 웃도는 추위였는데, 벌써 꽃구경을 계획하는 것을 보면, 지난 겨울에는 뜨개를 많이 하지 않았나 보다. 계절을 앞서가겠다며 한겨울에 네트백 바닥을 뜨기 시작했는데, 봄이 온 지금도 바닥에 머물러 있다. 게을리 뜨다 보면 계절을 거르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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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뜨개 한도가 정해진 '붕붕이'가 있다. 붕붕이에 담기지 않는 실은 사지않기로 했다. 이전에는 양초나 라탄 같은 다른 취미생활도 담겨있었는데, 지금은 4칸 모두 뜨개용품으로 가득차있다. 마치 다 읽겠다고 사왔지만 아직 못읽은 책으로 가득한 책장과 다를 것이 없다. 실 종류도 계절별로 있어 외면하고 새로운 실을 살 수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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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 붕붕이 속에서 무난한 검은색을 들어 올렸다. 일단 촘촘하게 네모바닥을 만들었는데, 완성된 네트백을 생각하니 네모 바닥은 늘어진 모습이 안 예쁜 것 같아서 다시 풀고 원형 바닥으로 떴다. 풀 땐 망설이거나 반만 풀면 안 된다. 무조건 다 풀어야 미련이 없다. 원형 바닥으로 각 코마다 2배씩 늘려서 총 140여 코가 되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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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바닥 완성! 몸통보다는 바닥을 뜰 때 좀 더 집중해서 하게 된다. 바닥은 안 보이니 오히려 크게 신경을 안쓸 수도 있지만, 바닥의 한코한코는 생각보다 전체 모양에 많은 영향을 준다. 특별한 기법이 있어 매 단(=한 줄)마다 다르게 뜨는 것이 아니라면, 원래 하기로 했던 규칙대로 잘 따라가면 된다.
사실 뜨개가방을 만들 때, 바닥면보다는 몸통 뜨는 걸 좋아한다. 규칙적인 방법으로 몸통을 올리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뜨다 보면 최근 가장 신경 쓰인 일이 생각나고, 그때부터 한 코 한 코 뜰 때마다, 온통 나에 대한 궁금증, 내가 왜 그랬을까,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걸까, 현명하고 좋은 결정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바늘 잡은 손은 열심히 코를 찾고, 눈은 실만 보고, 집중하면 주변은 고요해지기 때문에 절로 차분해진다. 이런 뜨개의 효능에 덕을 본 것은 나와 동거인과의 관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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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인과 나는 화를 표출하고 소화하는 방식이 다르다. 나는 시간을 들여 생각을 정리한 후에 입장표명을 하고, 동거인은 상황에 대해 바로 말하고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하는 성향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정리가 되지만 동거인은 같은 시간 동안 감정과 언쟁의 대화를 잊는다. 내게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면 날카로운 말을 하게 되고, 동거인은 시간이 더 걸리면 갈등에서 받은 기분을 잊지 않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나는 생각을 빨리 정리해야 할 때, 뜨개실을 찾아 침대에 들어간다. 등 대고 앉아한 코 씩 뜨다 보면, "너는 왜 말을 그렇게 해?, 왜 이렇게 밖에 못 해?"라는 말이 "나는 사실 너한테 이 말이 듣고 싶어서 그랬어"로 바뀐다. 날카로워져 있는 말들을 한 코 한 코 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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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통을 26단(=26줄)까지 올린다. 마지막 단을 남겨두고 25단에 조금 더 두꺼운 실로 끈을 만들어 교차해서 통과한다. (오른쪽 사진) 몸통과 같은 실로 가방끈을 만들면 여름에는 얇은 옷을 입기 때문에 어깨가 눌려 아플 것 같아 조금 더 두꺼운 실을 선택했다. 25단 전체를 교차해서 통과한 후 바닥면에 끈을 연결해 준다. 바닥과 연결한 가방끈은 언제든 길이 조정이 가능하도록 가볍게 매듭지어 둔다. 무게가 실리면 가벼운 매듭도 단단해지니 풀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결국 이 네트가방도 누군가에게 갈 것이다. 새로운 주인을 만나 사랑을 받으면서, 내가 이 가방을 붙잡고 생각했던 일들이 일상 속에서 아주 작은 일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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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잇는 상점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 이야기가 담긴 물건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상점'에는 '서로서로', '뜨ㅓ', '사부작 사부작', '개, 장소, 환대', '그 여자가 사제끼는 법' 5개의 이야기가 입점해있고, 매주 각 상점의 이야기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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