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9월이었는데 곧 10월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간다는 말을 자주 하게되는 요즘, 실사출력을 전문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나는 지금이 아주 딱 바쁘다. 8월 휴가철이 끝나니 비영리단체든 공공기관이든 계획해둔 행사를실행하기 바쁘기 때문에 현수막 주문도 늘어난다. 외주 작업만 하던 프리랜서에서 반직장인이 된지 어느덧 4년차. 1~2월 한가하고, 3~5월 바쁘고, 6~8월 한가하고, 9~12월을 바쁘게 보내는 한 해의 사이클이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가끔 허무하다.
최선을 다해서 일한 것에 성취감이 느껴지기보다는 매년 이렇게 일해야한다면 그만하고 싶다, 에너지를 꺼내 쓰기만 하고 채워넣지 못해서 어쩌지 걱정이 앞선다. 의뢰인들은 디자인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터무니없는 빡빡한납기 일정에도 불구하고 ‘핀터레스트’의 인기이미지처럼 퀄리티가 높기를 바란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협업이 아니라 강요나 마찬가지인 수정요청은 희미하게 파닥이고 있는 내 한쪽 날개마저 부러뜨린다. 내 눈에는 예쁘지 않아도 그들이 원하는대로 영혼을 잠시 빼두고 작업을 마무리한다.
그래도 외주작업은 조금 더 즐겁게 할 수 있다. 내 디자인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주로 의뢰가 들어오고, 나의 실험적인 도전에도 관대하다. 평소에 채워둔 영감주머니에서 해보고 싶었던 이미지를 꺼내 내 스타일로 이리저리 변주해본다. 그러다 스스로 보기에도 마음에 드는 비주얼이 나오면 자화자찬을 잊지 않는다. “나 천재 아니야?”
제일 즐거운 작업은 이상점이다. 이상점 인스타그램 피드나 스토리에 올라가는 이미지들은 대부분 손글씨로 만드는데, “내 마음대로”, “나 하고싶은대로”한다. 이상점은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공간이면서 내 개인적 욕망의 분출구다. 내 눈에 예쁜 것만 하고, 이걸 예쁘게 보는 사람들이 모임에 참여하거나 내가 만드는 것을 사겠지! 완전히 배짱이다.
이렇게 즐겁고 뭐든 내 마음대로 하는 일도 시간에 쫓기는 바쁜 시기에는 짐이 된다. 하고싶은 건 많고, 더 잘해내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즐겁게 하려던 일을 쳐내야 하는 것으로 후다닥 넘겨버려 속상할 때가 많다. 이 마음은 진짜로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것처럼 느껴지는) 회사 일이나 외주작업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이상점의 수입으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다. 하고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것은 아직 내게는 요원한 일이다. 다행인 건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는 것. 하고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도 난관은 어디든 존재하고 언제든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원하는 건 하고싶은 일만 하면서 바쁘고, 어렵고, 힘들고 싶다는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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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2017년즈음이었나, 우연히 치앙마이가 디지털노마드의 천국이라는 카피를 보고 무작정 한달살기를 하러 갔었다. 그 이후 치앙마이는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내가 좋았던 건 내 친구들도 무조건 좋아할 거라는 믿음이 있는데 나의 열렬한치앙마이 예찬에 친구들과 한 번씩은 치앙마이를 따로 또 같이 여행했다. 지금은 그 친구들 중 한명과 치앙마이로 향하는비행기 안이다.
비행기 타러 가기 직전까지 모니터 앞에 앉아서 미처 끝마치지 못한 작업을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고 가고싶던 치앙마이를 긴 코로나 끝에 드디어 가게 되었는데도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았다. 전자책으로 읽을 거라 따로 종이책을 챙기지 않았는데 마침 공항에서 서점을 발견했고, 제목을 보자마자 이 책은 이번 여행에서 내 동앗줄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이유를 알게될 것 같았다. 게다가 흠모하고 동경하는 두 작가님이 서로에게 쓴 편지 형식의 책이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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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찾아 몽둥이 들고 쫓아간다니! 난 치앙마이로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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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유독 최선을 다하는 해였다. 새로운 공간을 열고, 과정에서 월세도 뜯기고, 사랑하는 강아지에게 물려 난생처음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두 차례나 했다. 퇴원하고 얼마 안 있어서 강아지와 산책하다가 넘어져 팔꿈치와 콧대를 대차게까였다. 그래도 꿋꿋했고 훌훌 털어냈고 유머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고싶은 일을 다 해내기 위해서는 체력이 필수라는 생각으로 일주일에 두번은 꼭 필라테스를 하고, 2주전부터는 매일 집앞 운동장을 뛰었다. 회사 일, 외주 작업, 각종 이상점 모임들에도 최선을 다했다.
치앙마이에도 최선을 다하러 갈 작정이었다. 10월 28일로 정해놓은 두번째 이달의 상점을 위해 치앙마이에서만 살 수있는 귀여운 소품들을 바잉하고, 새로운 곳들을 찾아다니며 쪼그라든 영감주머니를 가득 채워오려고 했다. 하지만 최선은 다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즐거울만큼만 해야지.
좋아하는 사람들이 해준 말만큼 힘이 센 것이 있을까.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라는 문장을 황선우, 김혼비가 말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와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몰랐던 나에게 딱 필요한 말을 해준 그녀들에게 감사한다.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완성하는 것으로, 치앙마이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난 자유다. 싸와디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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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한 이야기 ep.1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고명재, 난다 📓 2023년 7월 31일 열여섯 번째 평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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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에세이를 읽고 있으면 ‘잊고 있던 혹은 사라진 줄만 알았던 마음의 한쪽 부위’가 건드려지는 거 같아요. 생소하고반가운 감동이 일어요. 평평에서는 이 책을 읽고 어린 시절과 그리운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요, 가끔은그렇게 조금 느린 리듬으로 서로의 회상과 추억을 나누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단어들이 단정한 조합된 아름다운 문장이 눈처럼 내려앉은 페이지를 저마다의 목소리로 읽을 때, 시간은 느려지고 마음은 깊어졌어요.
‘이렇게 알지 못해도 생존에는 하등 영향이 없는, 그러나 알게 되면 세상이 애틋해지는 이야기가 좋다. 나는 이런 것들을시, 라고 부르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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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조지 오웰, 민음사 📓 2023년 8월 7일 열일곱 번째 평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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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러시아 공산주의 정권의 독재, 부패 과정을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풍자한 조지오웰의 1945년작품입니다. 쉽고 재미있기 때문에 평평 사람들 모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기도 해요. 생각보다 더욱 충실하게 역사적사실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러시아 역사의 흐름도 함께 훑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이 소설이 시간의 압력을 견디어 지금도 널리 읽히는 이유는 권력, 대중, 혁명, 사회주의, 나아가 인간의 두려움과 무지, 무기력, 자만과 기만, 각성 등에 관한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좋은 책은 보다 더 활발하고 깊이 있는 토론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된 시간이었어요.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관계가 없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 조지 오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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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과 울림」 김상욱, 동아시아 📓 2023년 8월 14일 열여덟 번째 평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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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 책을 읽고 모인 평평 사람들은 모두 문과인데, 역시나 과학책을 이해하기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각자 이해한 것들을 조각보처럼 모아 기우면서 혼자 읽을 때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얻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과학적 법칙들에대해 최대한 다정하게 설명하고 인문학적 사유와 부드럽게 연결해 주는 김상욱 교수의 글들이, 더 큰 범위로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것만은 분명합니다. 책에서는 투명망토와 타임머신이 불가능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알려 주었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라는 질문을 두고 한참이나 떠들었어요. 이론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도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가능하게 하니까요. 호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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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반비 📓 2023년 8월 21일 열아홉 번째 평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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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플레인(mansplain) 용어를 탄생시킨 리베카 솔닛의 방랑과 탐색, 모험의 에세이입니다. 글 안에서도 길을 여러 번잃게 만드는 솔닛만의 거침없고 광활한 사유와 감성이 밀도 높은 문장으로 가득 담겨있는 책이에요. 비록 꼼꼼하게 읽기에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솔닛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보석 같은 진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평평 사람들 모두 동의했습니다. 정말 좋은 문장들이 많지만, 대단히 좋은 문장을 옮겨 볼게요.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움을 그저 욕정이나 감탄을 일으키는 무언가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은꼭 삶의 운명이나 숙명이나 의미처럼 느껴지는 방식으로 아름답다. 어떤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방식으로아름답다.‘
’달리는 사람의 발걸음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도약이라서 그는 순간적으로나마 땅에서 완전히 떠 있게 된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몇 분 동안 공중에 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꿈꾼다. 우리는 크기를 잴 수도없을 만큼 작은 조각으로 조금씩 천국을 삼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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