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30. 이야기를 잇는 상점 스무 번째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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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네트백
(부제 :실패작도 있을 수 있잖아)
어렸을 때, 항상 맛있는 요리를 한가득 만들어내는 엄마 덕에, 일주일 동안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소풍이 있을 때면, 엄마는 주말 내내 우엉을 조리고 당근을 볶고 지단을 만들었다. 그 주에는 참치김밥, 치즈김밥, 파프리카김밥, 소고기김밥, 계란물에 부친 김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입에 김밥을 세 개씩 넣고 우걱우걱 먹었을 때 그 만족감. 일주일 내내 같은 음식을 먹고도 나는 튼튼하게 자랐고, 기억할 때마다 행복했다. 하나를 오랫동안 좋아하는 게 익숙해서인지, 일주일 동안 엄마의 요리에 빠졌던 어릴 적처럼, 크고 나서도 무언가에 빠지면 오랫동안 헤어 나오지 못한다. 콩국수, 티코 초콜릿 아이스크림, 평양냉면 등등.
https://www.instagram.com/hutonnonakanineko/
실도 마찬가지이다. 몇 해 전 나의 인플루언서 "후톤노나카니네코"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에코백, 머리띠를 만들 수 있는 예쁜 실이 올라왔다. 실의 두께가 여름에 적당하고, 색이 예뻐서 검은색, 회색, 초록색을 각각 1콘 씩 사서 그때부터 조금씩 소진하고 있다. 3콘의 실은 그동안 에코백, 카드지갑, 텀블러 가방이 되어 다른 사람들 손으로 갔다. 좋아하는 만큼 나에게도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남아 있는 작업물이 없었다. 더 오래 좋아하기 위해 얇고 예쁜 회색실로 나의 여름 네트백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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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이 썼는데도 아직 가방 3개는 거뜬히 만들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이다. 예전에 구매했던 네트백 도안이 있어서 디자인은 고민하지 않고 뜨기 시작했다. 도안에서는 사슬 뜨기를 100코 이상 하라고 했다. 보통 아래부터 위로 가방이 길어지는 방법을 쓰는데, 100코 이상의 사슬 뜨기를 뜨고 가로길이를 길게, 세로를 짧게 떠서 반을 접는 방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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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 긴 뜨기 + 사슬 1코 뜨기 조합은 내가 제일 많이 쓰는 코바늘 기법이다. 작업물이 금방 커지고, 이 단순한 조합을 무한 반복해도 꽤 완성도 높은 편물이 나오고, 무엇보다 안정적인 반복작업으로 생각을 비우면서 동시에 채울 수 있는 뜨개의 재미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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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은 나의 인플루언서 제작이므로 중간 검증도 하지 않고 계속 쌓아 올렸다. 만들면서 여름 흰 원피스에 들고나갈 생각, 적당히 귀여운 키링을 사서 달고 다닐 생각, 아는 멍멍이 얼굴을 모델 삼아 넙데데하게 떠서 가방에 덧 붙일 생각, 다이어리나 텀블러 넣어 다닐 생각에 바빠서 모양은 안 보고 뜨기만 했다. 100여 코가 한 줄이니, 한 줄을 완성하는데 약 30분 정도 시간이 걸렸다. 첫 사슬코 뜰 때와 첫 3줄까지는 끝이 안 보이다가, 끝을 기대하지 않으니 어느덧 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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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백은 늘어지는 맛이기에 가방을 만들면 일단 뭘 넣어본다. 그런데......이 가방 뭔가 이상하다..... 다 만든 가방 끈은 너무 짧고, 가방은 반을 접었는데도 너무 길다.............. 가지고 있는 귀요미들로 치장을 해 보아도, 귀요미들은 너무 짧고 작고, 긴 가방의 이상함이 가려지지 않는다.... 책을 가로로 2권 넣고도 높이가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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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의 실의 소재가 다른 것을 완성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옆으로 길게 떴으니 전체 길이를 줄이려 해도 100여 코를 시작했던 첫 사슬까지 다 풀어야 한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갔던 완성본을 다 풀어낼 용기는 없어서 한참을 멘붕에 빠져 있었다. 푸를까, 그냥 옷장 안에 실패작으로 넣어둘까. 손이 저려서 이제 당분간은 뜨개를 못할 것 같은데, 그럼 내 여름가방은 언제 만들지. 흰 원피스에는 뭐 들지. 그냥 만든 걸 살까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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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쏟은 것에 비해 완성품이 너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실이 주는 여름 감촉이 좋았고 구멍 숭숭 뚫린 무늬가 좋았다. 결국 나는 풀거나 숨겨두지 않고 그냥 생겨진 대로 들고 다니기로 결정했다. 누군가 가방이 너무 길어 이상하다고 하더라도 내 기대와 꾸준히 좋아하는 것을 담아 만든 이 못난이 같은 가방을 좋아해주고 싶었다. 못난이가 내 관심을 받고 얼른 예뻐져서 이 못난이를 왜 좋아하는지 소개하며 여름을 보냈으면 좋겠다. 꾸준한 마음에 응원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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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잇는 상점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 이야기가 담긴 물건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상점'에는 '서로서로', '뜨ㅓ', '사부작 사부작', '개, 장소, 환대', '그 여자가 사제끼는 법' 5개의 이야기가 입점해있고, 매주 각 상점의 이야기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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